| 이라크 석유는 어디로 흘러가나(VI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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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방식의 광구개발계약 1999년 1월 이라크 석유성은 상부 지시를 받아 협의하던 PSC(생산물분배계약)를 전면 중단하였다. 석유성은 현행법상 외국인은 원유지분을 소유 할 수 없다는 법적 근거를 내 세워 PSC 계약방식을 추진해왔다. 이를 통해 국제석유회사를 대거 참여시켜 유엔 경제제재를 풀어 보고자 하는 속셈이었다. 소련, 중국과 PSC 계약을 체결하고 다른 나라와도 이 방식을 추진했지만, 허사였다. 미국이 이에 반대하는 강경한 태도를 추해 계약을 추진한 나라들이 선뜻 유엔 결의를 위반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태를 파악한 이라크 정부는 새로운 계약방식을 추진했다. 원유지분의 현물 소유권이 아니라 매입권(Buy-Back)을 주는 방식이었지만, 이란에서는 이미 사용하는 계약방식이었다. 우리와의 계약서 초안은 1년 후인 2000년 1월에 작성되어 정부 고위층의 승낙을 받았으나 아직 줄 수 없다고 했다. 최종안을 차기 회담 때 주겠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아직 최종안이 확정되지 않은 듯 했다. 그리고 비공식 회의를 통해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ONGC(인도 국영석유)와 PERTAMINA(인도네시아 국영석유), PETROVIETNAM(베트남 국영석유) 등에게도 새로운 계약 방식에 대한 설명을 했다. 이어 각자의 자체 안을 작성, 제출하라고 통보했다. 이에 반해, 우리에게는 계약을 간단히 설명하고 경제성 검토에 필요한 사항 등을 알려주면서, 이번에는 선두 주자로 뛰지 말고 준비만 하고 있으면 자신들이 제안서 제출 적기를 알려 줄 테니 그때 제출하면 될 것이라고 언질을 주었다. 지난번에는 한국컨소시엄이 선두주자로 제출한 안이 노출되어 불리하게 작용했다. 미국이 이라크 원유 증산을 희망하고 있어 외국인 투자를 부분적으로 허락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으니 새로운 계약방식에 맞도록 모든 준비를 서두르라는 것이었다. 이들이 제안한 새로운 계약조건은 계약기간 12년, 운영권은 7~8년 후 이라크에 인계하는 방식이었다. 운영권 인계 후에는 기술협력계약을 체결키로 했다. 지분율은 우리 90%에 이라크 정부 10%의 조건이었다. 원유 확보방안은 비용회수를 위한 원유와 광구에서 생산하는 원유의 25%를 구입할 수 있도록 했다. 이라크 측의 평가기준은 생산율, 투자비 및 보수비율 등이며, 이와 같은 광구계약도 종전에 거론되었던 10개 광구에 한해 적용한다고 밝혔다. 더욱이 한국 컨소시엄의 입지는 종전과 같이 유지된다고 덧붙였다. 또 이라크 석유성은 유엔으로부터 승인을 받아 기존 유전의 개보수를 실시할 계획인데 한국 업체도 참여 해주기를 바란다고 전해왔다. 공사내역은 정유공장 보수, 송유관, 시추설비 등이다. 중국과 소련보다 우리나라를 선호한다면서 상세한 내용이 담긴 자료를 주면서 말하기를, 이번 새로운 계약도 빠른 시일 내 준비하였다가 경제 제재가 풀리는 즉시 체결 할 수 있도록 양측에서 준비를 잘하자고 하였다. 2000년 4월 18일부터 20일까지 비공식 및 공식회의를 수 차례에 걸쳐 실시하고 쌍방간에 할파야 광구협의를 새로운 계약조건을 가지고 다시 시작하기로 확정하였다.
※당시 회의록의 주요골자(2004년 4월 20일 바그다드) -한국 컨소시엄 측은 이라크 측에 동남아시아 모든 국가들이 경제 위기에 처하였다. 그러나 한국은 적절한 대처 방안을 취하여 빠른 시일 내 잘 극복하였다.고 간단히 설명하였다.
-이라크 측은 서로간에 협상하던 개발생산계약의 방식을 변경 하였다고 설명하였다. 이 변경의 목적은 양측이 명확한 구분 하에 계약을 안정적이고 용이 하게 집행을 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 -한국측은 컨소시엄 회원사와 검토할 것이며, 새롭게 요구되는 사항을 확인하여 해당되는 계약상의 의무조항을 수정하고, 이 수정 계약서 안을 적기에 석유성이 검토할 수 있도록 제출 할 것이다. -이라크 측은 이라크와 유엔간의 석유산업에 필요한 부속품의 공급 절차를 설명하고, 이와 관련하여 한국이 참여하도록 초청하였다. 한국에 돌아와 컨소시엄회의를 소집하고 향후 대책을 논의하였다. 각사의 의견은 다소 차이가 있었으나 분명한 것은 이라크 할파야 광구를 포기할 수는 없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국영기업체인 한국석유공사는 우선 원유확보가 가능하여 찬성하였고, 삼성은 연관된 거래에 관심이 컸다. SK는 이라크 바스라 원유를 사용하고 있어 이라크와 유대를 강화하려고 했다. 간사를 맡고 있던 HI&T는 어떠한 계약 형태로든 성사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이 새로운 계약은 경제성만 문제가 아니라 무려 16개 조문을 수정해야만 했다. 이라크 측은 PSC계약에서 양보했던 내용도 다시 원래대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입맛대로 조문을 변경하고 추가하였다.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동시에 전에 약속했던 1억 달러 식량 차관은 철회하기로 했다. 생산 원유의 25%까지 구입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기는 하나 직접적인 원유 확보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즉, 원유 지분이 없기 때문에 서명 보너스격인 식량 원조를 해줄 명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몇 년에 걸쳐 수십 차례 바그다드를 방문하면서 겨우 합의된 PSC가 하루 아침에 허사가 되어 이제 다시 시작하자니 적지 아니 힘든 시점이었다. 할파야 광구의 경제성은 여러 가지 관련 요인에 따라 좌우되지만 석유성과 새로운 조건하에서 보수 지수를 합리적으로 정해야 수익성을 높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경제성에 영향을 주는 요인
-유가: 가정이지 결정할 수 있는 요인이 아니며 경제성에 상당한 영향을 주지만 상대적으로 민감도는 그리 크다고 볼 수 없다. 앞선 PSC 경우와 같이 유가 수준을 계약조건으로 논의 할 수는 없다. 자체 역량으로 판단하여 경제성을 계상해야 한다. 그러나 가급적 이라크의 예상에 접근해야 한다. -비용회수: 계약기간이 12년으로 짧고 투자비회수와 보수비의 산정기간인 운영권 양도기간이 금방 도래(7년)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투자비회수는 빠를수록 좋다. -비용회수한도 50%를 늘릴 수 없다면 운영권 인도기간을 늦추는 것도 대안이지만 이것도 쉽지 않을 경우 비용회수와 보수비 산정의 종료기한을 별도로 정해 운영권 인도 기간보다 늦추어 잡는 것도 한 방법이다. -개발비 증감이 경제성에 미치는 영향력은 적음.(10%변동에 내부수익율은 0.5%이하) -서명보너스는 고려치 않음. * 내부수익율(Internal Rate of Return, IRR) 17%를 목표로 하여 보수지수(‘r’ index)를 산출하여 이라크 측과 협상하기로 한국 컨소시엄이 합의하였다. -투자비회수한도(Cost Recovery Cap): 50%(고정) -보수비한도(Remuneration Cap): 10%(고정) -보수비지수(‘r’ Renunciation Index): 0.375(변동치로 협상대상) 할파야 광구의 마지막협상 이라크 10대 발견 광구에 관한 협상은 1991년 프랑스 석유회사가 처음으로 협의하기 시작했으며, 이듬해인 1992년부터는 수많은 외국회사가 협상에 참여하였다. 이라크의 시도는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 했다. 국제 석유회사가 큰 관심을 가지고 광구계약을 체결함으로써 경제제재를 풀어보려는 의도와 또 하나는 외국 투자자본을 대대적으로 유도하여 장기 목표인 일산 600만 배럴의 생산을 달성 하려는 것이었다. 특히 미국 석유회사의 참여를 고대했다. 실제로 몇몇 미국 회사들이 수면 아래에서 작업을 하다가 초기에 그만 두었다. 이 물결에 우리나라는 1994년 발을 들어 놓았다. 시기적으로 보아 이른 것도 늦은 것도 아닌 적당한 타이밍이었다. 원래 이라크 정부는 할파야 광구를 개발하려고 이탈리아 AGIP SPA(2003년 ENI가 흡수합병)에게 용역을 주어 모든 조사를 마치고 석유를 발견했다. 하지만 이란과의 8년 전쟁으로 할파야 광구의 개발은 중단되었다. 이후 1994년 우리나라가, 1995년 호주(BHP)가, 1996년 중국(CNPC, 중국석유천연가스집단공사)이 할파야 광구 개발에 참여했다. 호주는 다량으로 생산되는 자국산 밀을 가지고, 중국은 정치적 및 경제적 이점을 가지고 덤벼들어 잘 나가는 듯 했다. 그러나 호주의 BHP는 내부 경영상의 문제가 있어 주춤하였고 중국은 먼저 계약한 광구의 계약 불이행으로 할파야 광구 협상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게는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개발사업에 틈새를 비집고 들어서려는 찰라 이라크는 새로운 계약을 들고 나왔다. 이라크 석유성의 적정 투자비는 15억5000만 달러이었다. 한국 컨소시엄의 수치가 대부분 높은 이유는 자체 평가능력이 한정적이라 외부용역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대형광구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상황에서 목표층의 분석도 간과하고 있었다. 참고로 중국이 2010년 할파야 광구 낙찰을 받을 때 배럴당 투자비가 1.50달러이었으니 13년 전의 한국 컨소시엄의 배럴당 1.35달러는 상당히 높은 숫자다. 이처럼 우리나라에게는 아주 불리한 입장이었다. 그대로 진행이 되었더라면 아마 입찰에서 제외되었을 것이다. 다행이 이라크 정부 내 우리에게 호의적인 한 고위층이 이러한 사실을 미리 알려주어 대책을 마련해 새로운 계약조건으로 경쟁적 위치에서 다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BHP와 CNPC도 이미 사업에서 손을 뗀 상태였다. 어느 정도 계약조건이 마무리 되었고 서명단계에 이르면 재숙고하여 결정하기로 하고 작성된 안을 석유성에 제출 하였다. 이에 석유성은 그간의 노력을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우리나라를 선호해서인지 몇 가지 충고를 해주었다. 추가로 새롭게 타당성 검토를 하지 말고 계약 전 단계이니까 1995년에 기 검토한 내용을 가지고 필요한 자료를 끌어내면 충분할 것이라고 말해줬다. 또 안정적인 생산 수준은 일산 22만5000배럴이니 이 수준은 차후 운영권을 인수받을 이라크 석유회사(SOC: South Oil Company)도 선호하는 수치이니 계속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개발단계의 소요기간은 소규모 광구 5년, 중간크기 광구는 6~7년으로 보고 있다. 할파야 광구 같은 초대형 광구에 대해 이런 계약을 한 적은 없지만, 제안한 7년은 타당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값싸게 생산 할 수 있는 1120억 배럴의 가채매장량을 계속 놓아 둘 수는 없을 것이며 유엔 경제 제재는 부분 또는 전부 머지않아 해제 될 것을 염두에 두고 계약 전 단계를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즉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추었다가 때가 되면 즉시 서명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2001년 4월 25일 새로운 계약에 따라 모든 조건을 수정 보완하여 석유성과 협의하려고 간사 회사 HI&T 홀로 바그다드로 출발했다. 이라크 석유성과 16개 조문을 축조심의하고 마지막에 경제성에 대해 설명하고 의견을 물었다. 석유성 실무 팀이나 우리 실무 관계자 모두 지쳐있기는 매한가지였다. 해가 갈 수록 이곳의 생활은 핍박해지고 살아날 길은 언제나 가능성만 지니고 있지 실현되지 않고 있으니 난감할 뿐이다. 미국은 대량살상무기를 은닉해두고 있다고 믿고 있으나 이곳의 식자들과 고위 관리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여러 번 말하는 것을 들었다. 석유성 실무자들과의 회의를 마치고 2001년 8월에 회의를 갖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지난 이번 4월 회의가 후세인 정권과의 마지막 회의가 될 줄은 당시 아무도 몰랐다. 지난 7년간의 협상도 물거품이 되었다. 귀국하여 컨소시엄회의를 소집하고 차후 대책을 논의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컨소시엄에 참여하고 있는 SK, 삼성, 석유공사의 대표들이 모두 경질됐다. 필자도 2001년 10월에 HI&T를 사임했다. 초창기 참여자들이 모두 사라지니 할파야 광구 사업은 어디로 갈 것인지, 기로에 서게 되었다. 약속한 2001년 8월이 되어도 어느 누구도 바그다드를 찾지 않았고 2002년은 그냥 지나가 버렸다. 2003년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유엔의 결의 없이 이라크를 침공하고 후세인 정권을 무참히 붕괴시켰다. 유엔 결의를 배재한 이유는 중국과 소련이 안보리에서 반대할 것이 분명 했기 때문이었다. 날조된 허위정보인 대량 살상무기가 있다는 전제하에 시작된 미국의 침공은 이스라엘 정책에 동조하고 미국의 패권주의를 중동에서 실현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막대한 전비와 종교 분파주의 갈등, 석유법의 난맥상 등 끝없는 문제에 봉착하고 말았다. 이라크 국민은 사회적 갈등과 생활고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석유공사의 헛된 노력 우리나라 정부는 미국의 침공에 동조하여 파병을 하였다. 등 떠밀리듯 파병을 하다보니 아무런 실리도 챙기지 못 하였다. 이왕 파병을 할 것이었으면 먼저 협상테이블에 나서 유리한 조건을 이끌어 냈어야 했다. 전후에 할파야 광구는 갈 길을 잃어 버렸다. 석유공사는 9년간의 협상으로 얻어진 기득권과 경험을 살리기는 커녕 또 다른 이라크 컨소시엄을 구성, 광구 개발사업은 분열의 길로 접어들었다. 할파야 광구를 제외한 여타 광구를 개발하겠다는 목적으로 컨소시엄을 만들었는데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유는 이제 와서 새로운 광구를 시작한다는 것은 늦어도 한참 늦었다. 당시 모 국회의원이 이라크 석유성 장관과 면담하는 장면이 TV에 나왔다. 마치 이라크에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가 만나는 것 같이 보였으나, 실은 영국 런던에서 만난 것이었다. 새 컨소시엄의 간사 회사인 범아자원은 2004년 2월에 설립된 자원개발 업체이다. 이들이 이라크 전후 건설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영국계 회사인 AMEC에 연줄이 있어 이라크 광구 참여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이 새로운 컨소시엄의 구성 회원은 석유공사, SK, 대성산업 및 범아자원이다. 석유공사는 한술 더 떠서 할파야 광구 컨소시엄 회원사에게 지분의 5%씩(석유공사는 제외)을 떼어 범아자원에게 무료로 양도토록 하여 사업에 참여시켰다. 또 범아자원을 간사 회사로 추진하여 이를 반대할 경우 할파야 광구 컨소시엄을 해체하자고 제의하였다. 하지만, 할파야 광구 컨소시엄은 4개사의 동의 없이는 일방적으로 해체가 불가능하다. 이는 석유공사의 새로운 실무자들이 컨소시엄 회사간에 합의된 계약조건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간 할파야 광구를 통해 이라크 석유성(특히 기술진)과의 협상·협의 노하우를 축적했으며, BHP, CNPC 등의 경쟁국의 계약조건, 경제성검토 및 기술자료도 확보한 상황이었다. 할파야 광구에 대한 검층자료, 시추자료 등의 제반 기술자료도 갖고 있었으며, 그간의 활동을 통해 석유성 기술진을 비롯한 인적 네트워크도 어느 정도 구축했었다. 더욱이 석유성 내에서 한국 컨소시엄의 기반이 구축돼 있었다는 점은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었다. 비용도 인건비, 사무실 운영비, 출장비, 외기술용역비, 의약품 지원 등으로 약 43억 원이 투자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석유공사는 이 같은 성과와 정성, 투자비 등을 도외시하고 확실치 않은 줄을 잡아보겠다고 나서는 중대한 착오를 범했다. 한마디로 10년간 쌓아 올린 공든탑을 막연한 생각으로 한 순간에 무너트리자는 것이었다. 1994년 석유공사 기술진은 할파야 광구 시작부터 그런 대형광구가 어디 있겠느냐며 황당무계하다는 입장을 보여왔지만, 두 번에 걸친 타당성 검토로 잘못된 것을 알아 차렸다. 석유공사는 10여년이 지나 새로운 컨소시엄을 구성했지만, 큰 진전은 없자 두 개의 컨소시엄을 하나로 합병하여 하나로 하자는 것이다. 즉, 할파야 광구 컨소시엄을 없애야 된다는 것이다. 북망산에 가보면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한다. 필자는 합병의 전말을 가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고 싶다. 계충무 고문은 서울대 경제학을 전공했고 한국전력, 대한석유공사(현 SK), 동아건설 등을 거쳐 한국석유공사 부사장을 역임했다. 한얼상사와 코람자원의 대표이사 활동으로 국제 자원개발 사업에 남다른 성과를 내기도 했으며 현재 HI&T 사장으로 취임해 이라크 할파야 유전개발 사업을 협상중이다. *상기 기사는 에너지코리아뉴스의 자매지 월간<CEO ENERGY>2013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
2013년 9월 23일 월요일
이라크 석유는 어디로 흘러가나(VII)
이라크 석유는 어디로 흘러가나(Ⅵ)
| 이라크 석유는 어디로 흘러가나(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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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외환위기(IMF사태) 한국 위환 경제위기의 시발점은 1997년 초 한보그룹의 도산사태로부터 비롯되었다. 계열사인 한보철강의 무리한 설비확장으로 자금난이 심화되자 시중 은행들은 두 번에 걸쳐 그야 말로 수 천억 원을 긴급지원 하였으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결국 은행채권단은 한보철강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어떻게 살려 보려고 하였으나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이 이를 받아 들이지 않아 결국 부도 처리되었고 법정관리로 들어갔다. 한보철강 공장은 일부만이 가동되고 대부분의 공장은 건설 중에 있었다. 그래서 한보철강의 부도는 자재 공급회사, 플랜트 엔지니어링 회사, 건설업체 등 대기업체는 물론이고 이들 회사와 관계되는 수많은 중소기업 업자에게까지 부도사태를 몰고 왔다. 결국에는 노무자에게까지 막심한 피해를 주게 됐다. 부도 당시 한보의 자산은 5조 원, 총부채는 6조6,000억 원(1997년 2월 기준)으로 부채가 자산보다 1조6,000억 원이 많은 상태였다. 이 차액은 모두 금융기관들의 손실로 돌아갔다. 한보사태로 인해서 금융기관들의 부실이 심각해졌으며 주거래 은행인 제일은행은 지급불능 상태에 빠졌다. 한보 부도를 요약하면 첫째, 투자의 수익성과 세계적인 철강공급 과잉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모한 투자결정과 그룹총수의 비합리적인 의식과 엉성한 경영관리. 둘째, 투자자금을 대주었던 금융기관들은 대규모 투자의 사업성을 평가하는데 소홀했고 거액의 대출이 불투명한 절차에 이루어졌다. 셋째, 그룹총수의 로비를 받은 대통령 측근과 정치인들이 정치 자금을 받는 대가로 사업인허가 및 대출 과정에 개입했다. 한보 도산은 기업경영, 금융, 정치 그리고 이들이 연결된 한국 경제시스템의 총체적 실패가 되었다. 한보사태가 일어나자 외국금융기관들은 한국기업의 신용도를 다시 평가하게 되었고, 한국금융기관들에게 거액의 자금을 비교적 쉽게 빌려주었던 외국금융기관들은 부실기업들에게 대출한 은행뿐 아니라 한국의 다른 금융기관들에 대해서도 신용상태를 의심하게 되었다. 1997년 2월 무디스는 한보에 대한 대출이 많다는 이유로 조흥은행, 외환은행, 제일은행의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하였다. 한보 부도 이후에도 대기업들의 부도가 계속 되었다. 3월에는 삼미그룹 5개사가 특수강의 공급과잉과 북미 현지 투자 실패로 부도가 났다. 정부는 4월 들어 대기업 연쇄부도가 정치경제에 미치는 파장을 우려하여 이를 차단하려고 ‘부도유예협약’을 도입하였다. 이 협약의 핵심은 채권 금융기관들이 부도위기에 처한 기업에게 신규자금을 공급해, 일단 부도위기에서 벗어나게 하는 대신에 해당 기업에게 강도 높은 자구노력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4월 진로그룹이 처음으로 부도유예협약의 적용을 받게 됐다. 이 협약이 적용되어 3개월간 부도위협에서 벗어났다. 5월에는 대농그룹, 7월에는 기아그룹이 적용을 받게 되었다. 부도 유예협약에는 은행과 종금사 등이 참여하였고 보험사 등 다른 금융기관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부도유예협약에 참가하지 않은 금융기관들은 해당 기업에 대해 채권행사를 할 수 있었으며, 이로 인한 손실은 부도유예협약에 참가한 금융기관들이 부담하였다. 부도유예협약에 참가한 채권금융기관들의 불만이 커지면서 9월 부도유예협약이 개정되었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농, 진로 등 대부분의 기업이 부도가 났다. 한보 부도 신호탄이 오르자 삼미, 진로, 기아, 해태, 뉴코아, 한라 등이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 부도나무에 줄줄이 걸려들었다. 한계기업 퇴출이 지연되면서 시간이 갈수록 부실이 커졌고 모든 부담은 금융기관이 안게 되는 결과를 초래 하였다. 부담이 큰 금융사는 부도난 회사의 어음을 할인해준 종금사였다. 담보물 없이도 어음만 믿고 대물해 주었기 때문에 피해가 컸던 것이다. 물론 잘못된 결과에 관한 이유는 변명을 포함하여 구구절절이 얼마든지 늘어 놓을 수 있겠으나 IMF 사태의 원인을 몇 가지 열거 해보면 다음과 같다. 지급준비정책의 변화 1996년 이후 금융기관의 대외경쟁력 제고와 공정경쟁을 위해 9%를 상회했던 지급준비율을 1~5%수준까지 대폭 인하함으로써 통화정책 수단으로서 지급준비율의 유용성은 크게 낮아져 은행 대출이 큰 폭으로 증가 되었다. 외환보유고 관리실패 정상적 경제활동을 위한 국가의 외환보유고를 유지 관리하고 책임을 지는 행정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당시 종합금융사를 비롯한 국내 금융기업들은 저리의 해외단기채를 얻어 동남아 국가들에 장기채로 빌려주면서 2~3%의 이자차익을 보았다. 그런 상황에서 동남아 국가들의 외환위기로 해외단기채들의 만기가 연장되지 않자 국내 자금을 이용해 이를 상환하고, 결과적으로 국내자금이 유출이 일어났다. 마치 기업의 부도와 마찬가지로 외환보유고가 하락하여 외환지급불능사태의 위기를 초래하였으며 이로 인해 국가신용도가 하향 조정되었고 원화가치의 환율이 급격히 하락하는 등 연쇄적으로 국제적 경제활동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정경유착으로 인한 부정대출 당시 김영삼 정부와 여당인 신한국당의 정경유착으로 인해 한보와 기아자동차에 불법적인 은행대출을 용인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이 한보철강으로 부터 막대한 액수의 뇌물을 받아 큰 물의를 일으켰다. 이와 같은 불법대출로 인해 두 업체의 부도로 각각 5조 원과 10조 원의 부실채권이 발생했고 이는 국가신인도 하락에 큰 영향을 미쳤다. 환율 운용 정책 실패 1997년 말 주변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경제가 어려워지자 외국 투자기관들은 한국의 경제도 곧 어려워질거라 판단하여 투자자금을 대규모로 회수해갔다. 또한 정부는 1997년 9월 이후 계속된 외환시장 불안정 속에서 원화 가치를 지키기 위한 인위적인 환율 방어를 시작하였고 이에 들어가는 비용이 증가함에 따라서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한편 만기가 돌아오는 해외차입금의 규모는 점차 증가하기 시작하여 외환지급불능사태가 초래하기 직전까지 몰리는 외환위기가 전면적으로 가시화되었다. 금융기관의 부실 1996년까지 24개의 투자금융회사가 종합금융회사로 전환되었고 이후 30개로 늘어나서 해외업무를 시작하였다. 이들은 외채를 끌어와서 어음교환을 시작하게 되었다. 기업이 부도를 일으키게 되자 외채를 끌어서 어음 할인한 이들 종금사(종합금융회사)들이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었고 특히 한보와 기아의 12조 원 가량의 대형 부도사태는 위기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1998년 6월 대동, 동남, 동화, 경기, 충청은행 등 5개 퇴출은행를 발표하고, 국민, 주택, 신한, 한미, 하나은행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들은 관치 금융의 그늘아래에서 부실한 경영을 하였으며 이들에게 연관된 작은 관련기업들도 연달아 도산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1998년 8월 고려, 국제, 태양, BYC 등 부실한 4개 생명보험사가 영업정지를 발표하고, 각각 알리안츠생명, 삼성생명, 대한생명, 교보생명으로 넘어갔다, 이러한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허술한 관치금융체제, 무능한 정부의 예산 낭비, 대기업들의 분식회계와 과도한 차입 부실 경영 그리고 당시 사회전체에 만연된 경제적 무능력과 부패, 책임의식 실종에 의한 결과였다. 대외 금융세력의 공격 국가개입 위주였던 아시아 국가들이 개방시장 정책을 시작했지만 외환관리 능력과 외환보유량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대외 금융세력의 공격에 무력할 수 밖에 없었다. 고정환율을 쓰던 태국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외환을 견디지 못해 변동환율로 선회한 것에 아시아 각국의 외국자본들이 빠져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지 소로스가 운용하던 퀀텀펀드를 비롯한 규모가 큰 국제금융세력들이 1990년대에 이미 독일, 영국, 멕시코 등지에서 여러 차례 감행했던 수법대로 약속한 듯이 동시에 단기 투자금을 회수해 빠져나가면서 선물환거래를 이용한 주식대량매도와 환투기 공격 등을 감행하여 동아시아 전반에 중앙은행의 외환보유량을 고갈시켰다. 그 후 달러 구제금융 요청을 받은 IMF가 제시한 가혹한 구조조정 조건을 통해 부실기업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기업까지 무너뜨려 헐값에 재인수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러한 국제적 투기세력들의 공격과는 별도로 그 무렵 미국 정부의 입장이 상당히 주목되는데, 미 국무부 정보조사국 INR은 한국에 외환위기가 발생하기 훨씬 전인 1997년 초부터 한보사태 등 한국의 경제 동향을 유심히 관찰했다. 주한 미대사관은 한국이 IMF 관리체제에 들어간 1997년 12월부터 아예 ‘IMF 데일리’라는 제목의 일일보고서를 작성해 본국으로 전송했는데 1998년 2월 미 국무부에 보낸 비밀 전문에 담긴 1998년도 한국관련 최우선 정책목표에는 한국이 금융위기를 해쳐나가도록 돕는 동시에 IMF와 미국에 대한 의무를 완전히 준수하도록 확실하게 압박하는 것이라고 명시돼 있었는바, 당시 한국은 IMF 협약뿐 아니라 미국에 정리해고제 도입과 적대적 M&A 허용도 약속한 상태였다. 또한 IMF 처방의 효과로 1998년 하반기에는 미국이 한국과의 시장개방협상에서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었다. 특히 미국정부는 한국이 스스로의 잘못으로 외환위기가 발생했다고 믿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면서, 외환위기의 원인과 관련해 이른바 내인론(內因論)에 한국 여론이 쏠리는 것을 반기는 입장이었다. 이는 한국 국민들로 하여금 당시 동아시아 전체 외환금융시장의 전반적 상황에 대한 이해보다는 당시 집권정부의 정책 실패와 무능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오래도록 각인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한 면이 있다. 뒷전으로 밀린 유전 개발 미국 걸프 오일은 세븐 시스터(BP, Gulf Oil, Royal Dutch Shell, Standard Oil California, Standard Oil New Jersey, Standard Oil Co. of New York, Texaco) 가운데 가장 뒤처지는 회사이다. 뒤늦게 중동 석유개발에 참여했지만, 쿠웨이트 지분을 확보하여 생산되는 원유를 판매할 시장을 찾고 있었다. 이에 걸프 오일은 한국에 정유공장과 석유화학 등 시설 투자를 하였다. 당시 석유화학 공장 투자는 그 자체만으로는 경제성이 그리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투자를 하는 것을 보고 원유 판매 수익을 고려한 것으로 판단됐다. 한국 시장에서 걸프 오일은 쿠웨이트 원유를 팔아 재미를 톡톡히 보았다. 그러나 결국 한국에서 철수하고 얼마 있다가 쉐브론에 흡수됐다. 1960~70년대 초 한국의 석유시장은 유공(SK 전신), 호남정유, 경인에너지, 극동정유 등 4개사 있으나 유공과 호남이 80% 이상 시장을 석권하고 있었다. 걸프사가 투자한 유공은 1차 석유 파동 때 쿠웨이트 원유를 배럴 당 2.9달러에서 11.6달러로, 즉 4배 상승 한 가격으로 도입해야만 했다. 그러나 호남정유와 여타 회사는 유공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도입했다. 이에 석유가격을 주도하던 한국 정부는 원유의 2중 도입가를 인정하고 국내 석유완제품 가격을 높은 원유가격을 기준으로 책정 고시하고 호남정유의 초과 이윤은 회수하여 ‘석유기금’을 조성하였다. 이 기금 조성의 당초 목적은 유류공급의 안정을 위하여 사용하기로 하였으나 원유 공급이 다소 안정되자 당초 의도와는 달리 사용처가 불분명하게 여기저기 쓰였다. 예를 들어 에너지 효율화에도 사용 할 수 있게 되자 뒷골목의 목욕탕 보일러 설치에도 지원을 하였다. 석유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서는 국내 비축이 제일 좋겠으나 저장시설 건설에 따른 시간과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결정을 함에 있어 신중했다. 반면, 해외 유전을 효과적으로 개발한다면 국내에 비축하는 것 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그것도 안정지역에 우리 원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해외유전 개발이 위험부담이 크기 때문에 선뜻 나서지 않았다. 당시 계산을 해보니 국내 비축보다 위험 부담을 감안 하더라도 약 1/8 가격으로 유전을 개발 할 수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국가가 필요로 하는 에너지 확보는 어느 정도 희생을 치러야 한다고 본다. 막대한 석유 기금이 조성되었으나 안정적 에너지확보에 효과적으로 쓰여 졌다고 볼 수 없다. 양적인 집적은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다고 했던가? 석유기금은 이제 온갖 곳에 사용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당시 한국석유공사의 개발본부장인 필자는 국내로 도입되는 원유 배럴당 10센트씩 별도로 원유개발비로 조성하자고 하였으나 정부는 우이독경이었다. 현재는 석유기금관리는 기획재정부로 넘어가 석유기금을 사용하려면 국회의 예산승인을 받아야 한다. 석유개발은 투자비를 이월도 해야 하고 급히 결정하여 즉각 투자를 하여야 하는데, 정부 예산지침에 따른다면 어느 세월에 개발에 나선단 말인가? 한국 국회는 제때 예산안을 통과 시킨 적이 있는가 말이다. 석유기금은 수 조원까지 조성되었으나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일반 세입으로 들어가 어렵게 되었다. 우리나라 풍토가 이러하니 해외 석유개발이 순조롭게 될 수가 없었다. 그러하니 정부는 외환위기에 처해지자 뒤집어쓴 멍에를 어떻게든 벗어 던지려고 국민을 닥달하여 금반지를 모으게 하지 않나, 강도 높은 구조조정으로 직원들을 길거리에 나앉게 하였다. 해외에 송금하려고 은행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중에 환율이 상승하였으니, 석유개발을 새롭게 시작하기는 불가능하였다. 기존의 사업도 겨우 추진하며 위약금을 내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써야만 했다. 이에 이라크 할파야 유전개발은 전면적으로 중단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컨소시엄의 간사회사이자 그 동안 물심양면으로 적극적으로 힘을 실어주었던 한얼상사 오너가 1999년 4월에 작고하여 유전개발사업은 정지 상태가 되고 말았다. 1998년은 기업, 은행 등 모든 경제조직이 구조 조정의 해였다. 1999년은 나이에도 아홉 수가 있듯이 구조조정에 실패한 조직이 퇴출 되는 해로서 그 대표적인 기업이 대우그룹이었다. 2000년은 IMF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김대중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이듬해 IMF를 조기 상환함으로써 종지부를 찍게 됐다. 할파야 유전개발 협상재개 3년만인 2000년 4월에 바그다드 석유성을 다시 찾았다. 실무 총책인 Dr.Tigriti는 반기면서도 뼈아픈 말을 건 낸다. 우리가 서로 믿고 계약서에 initial 한 후 진전을 보지 못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3개월에 한 번쯤을 만났어야 하지 않겠는가? 한국은 우호국도 아니고 블랙리스트에도 올라 있지 않은 gray zone에 들어 있으나 이라크는 한국을 아주 중요한 나라라고 보며, 또한 믿을 수 있는 나라라고 여겼으나 3년간 오지 않음으로써 의문을 갖게 됐다고... 공백기간의 사유를 한국 경제의 직면했던 여러 가지 문제, 한얼 오너의 별세 등 한국컨소시엄의 고난을 상세히 설명해주었더니 다소 이해하는 듯 했다. 이제 한국 경제도 외환보유고 800억 달러 상회, 1999년 경제 성장률 13%, 산업 구조 조정 단행 등으로 회복되었고, 한얼 그룹도 재정비되었다고 전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3년 동안 할파야 광구에 관하여 적극적으로 덤벼든 국가는 없었다고 우리에게 우호적인 한 사람이 귀띔을 해주었다. 신규 광구개발 계약체재는 PSC와 Buy-Back 양쪽 모델을 절충하여 만들었다. PSC와 비슷한 점은 ▲모든 석유관련 비용은 회수 할 수 있으며 비용의 상한선은 없음 ▲미회수 비용은 이월되며, 생산 정산 시 생산량의 50%까지 회수 가능 ▲보상 지수 r에 따라 순 생산량의 최대 10%까지 보상을 지급, 부족분은 이월 가능 등이었다. Buy-Back 계약과 흡사한 점은 ▲계약자는 운영권 인계 후 15년간 원유 매입권을 옵션으로 갖음 ▲계약자는 원유에 대한 소유권이 없음 ▲다만 투자비 회수 권한과 보상에 관련하여 이라크가 판매하는 조건으로 원유로 받을 수 있음 등이었다. 석유성의 입장은 확고했다. 석유회사가 선호하는 PSC 계약을 체결 한들 전혀 일이 진전되지 않고 그들의 표현대로 얼어 붙으니 계약을 자기 입맛대로 하려고 이미 프랑스와 말레이시아, 인도 등과는 반승낙을 받아 놓고 3년 만에 나타난 한국에도 늦지 않았으니 이제부터 라도 박차를 가하라는 것이었다. 해외 유전개발의 의미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개발한 유전의 원유 소유권을 확보함으로써 공급 부족사태 시 원활한 석유를 확보할 수 있다. 그것도 시장가격과 상관없이 경제성 검토 시 책정하였던 가격으로 확보하여 추가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라크 석유성의 태도 변화는 표면적으로는 법에 저촉된다고 하지만 그들의 당초 전략인 무역제재를 철회하는데 광구 분양에 초점을 두고 중국과 소련에 시험 삼아 한 건씩 계약을 하고 작업을 하라고 독촉하였으나 요지부동이라 급선회한 것이다. 그래도 그들의 속내를 알아보려 든 차에 부인치료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던 한 고위 간부가 친필로 3페이지가 넘게 상세한 내용을 정성껏 쓴 문서를 주는 것이다. 그 내용을 일부만을 적어보면 당시의 상황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그간에 석유성은 조직 변경과 인사이동이 있었으나 한국은 그대로 Dr. Tigriti가 말게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는 담담했다. 이라크 정부도 이제는 제재를 중국이나 소련에 의존 해 봤자 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유전 분양도 엄격하게 경제성에 비중을 두고 검토 할 것이며 한국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니 새로운 계약 방식에 따라 검토하여 차기 회의 때 협의 하자고 제의하였다. 관련된 자료를 공식 비공식으로 모두 취득하여 새로운 각오 하에 바그다드를 떠났다. 이때 국제사회에서는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사담 후세인이 대량 살상무기를 교묘한 전술로 사막 속에 숨겨 놓고 있으며, ‘신의 주먹’이라는 이라크 첩보원의 활약을 그린 소설에서는 원자탄을 갖고 있다고 써 놓았다. 그리고 후세인은 미국의 침공은 소련과 중국이 안보리에서 막아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나의 오랜 좋은 친구’에게 친구가 바그다드에 다시 왔다는 말을 듣고 무척이나 반가웠네. 특히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는 건강이라니 참 기쁘네. 이 나라는 아직도 경제제재 하에서 어렵사리 살고 있네. 그리고 기꺼히 말해주고 싶은 것은 3년이라는 공백에도 불구하고 할파야 사업 추진함에 있어 별로 잃은 것이 없어 참으로 다행이네. 경쟁자였던 중국은 그간 계속 협의 하여오다가 석유성에서 1998년 1월에 중지시켰다. 그 이유는 1997년 6월 아다프광구 계약을 해 놓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일세. 2000년 2월 호주 BHP는 석유성을 방문하고 경영진이 철수를 결정하였다고 전하여 왔네. 5~6년 공을 들이더니 이제는 그야말로 한국 혼자 남게 되었네. 왜 그리 쉽게 물러들 나는지 측은한 생각마저 드네. 내가 생각엔 적기에 다시 찾아 왔다고 보네. 유엔이 외국 석유회사의 對이라크 투자는 허용한다는 조짐이 있다고 하니 더욱 그러하네. 그러나 석유성과는 새로운 방식의 계약을 협의 하게 되었네. 골격은 PSC와 하청계약 방식을 절충한 것으로 수익 면에서 PSC와 거의 비슷하다고 보네. 사업적 측면에서 본다면 cost-plus 방식과 거의 흡사하네. [이하 상략] *상기 기사는 에너지코리아뉴스의 자매지 월간 CEO ENERGY 2013년 5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
이라크 석유는 어디로 흘러가나 (V)
| 이라크 석유는 어디로 흘러가나 (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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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쉽지 않은 계약과정 사담 후세인 체제 하에서 광구계약 체결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6단계의 계약과정을 거쳐 확정, 발효됐다. 우선 한국 컨소시엄과 석유성 실무진간에 축조심의를 거쳐 장관에게 보고되고, 장관은 검토·수정하여 석유성 안을 작성, 각의에 상정한다. 각의에서는 부처별 의견을 수렴하여 최종적인 정부안이 마련된다. 이 정부안은 혁명위원회에 회부되어 주로 정치적 측면에서 다루어진 후 의회에 상정, 표결에 부친다. 의회에서 가결되면 대통령 후세인이 선포, 광구계약이 종료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일견 복잡한 것처럼 보이나 실무상에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실제로는 석유성 장관이 제일 중요했다. 이라크의 석유성 장관쯤 되면 이미 후세인의 손발이나 다름없으며 일국의 돈줄은 쥐고 있으니 발언권이 상당할 수 밖에 없었다. 다음은 혁명위원회. 이 위원회는 정치적 측면을 주로 다루는데 그 목적에 따라 찬반을 쉽게 뒤바꿀 수가 있었다. 그리고 경제성 측면에서도 정치적으로 과도하게 요구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물론 각 단계마다 후세인의 입김이 강하고 의회가 최종 결의했다고 하여도 위원회는 필요하다면 그 막강한 파워를 행사하여 새로운 요구를 할 수 있었다. 이 뿐만 아니라 유엔의 경제 제재로 인하여 광구계약이 체결되어도 작업에 착수할 수 없었다. 이유는 석유성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분에서 실무협상단계에서 온갖 무리한 요구를 해왔기 때문이다. 석유개발을 위한 이라크 첫 방문은 1994년 6월 이루어졌다. 2년 후인 1996년 3월에 계약서 초안이 작성되었으나, 수정 보완과정을 거쳐 10개월 후인 1997년 1월에서야 대부분 실무 합의가 이루어진 기본합의서에 서명(Initial signing)을 할 수 있었다. 계약명은 ‘할파야 광구 개발 및 생산 계약(DEVELOPMENT AND PRODUCTION CONTRACT RELATING TO THE HALFAYA FIELD)’이다. 그 외 1억 달러 상당의 물자 지원에 관한 계약은 무역성과 기본적인 합의만 해 놓고 본 계약이 체결되는 시점에서 서명하기로 하였다. 계약체결 후 석유성은 경제 제재가 끝나면 즉시 사업에 착수 할 수 있도록 광구개발에 필요한 자제를 사전에 주문하라고 요구해 왔다. 특히 생산기간이 오래 걸리는 물품은 그 품목을 주면서 생산자와 계약을 하라고 지시했다. 새로 부임한 알 라시드 석유성 장관은 아주 강경했다. 이 사람은 영국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한 엔지니어로서 오랜 기간 동안 국방장관을 지내면서 이라크를 무장시키는데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의 부인도 유명한 화학자로서 독가스 전문가인데 쿠르드족에 독가스를 살포하여 크나큰 인명피해를 주었다. 그래서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주요 전범으로 체포되어 행방이 묘연하다. 서명 후에도 문제는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었다. 우선 OPEC의 감산조치를 단행하는 경우 할파야 유전에서의 생산량, 생산기간 등을 얼마나 줄여야 하는지가 문제였다. 또 감산기간이 1년을 넘지 않으면 국제석유회사가 보상없이 받아들여야 한다거나, 1년이 넘으면 이라크 정부가 일부 보상을 해야 한다는 등의 이견이었다. 투자비회수 기간이 길어지고 수익성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노력하였으나, 결국 석유성 안을 받아 드릴 수 밖에 없었다. 이라크는 OPEC 창설 회원이고 외국석유회사와 수없이 협상을 해본 경험이 있기에 그들을 설득시키기 어려웠다. 다만 우리로서는 이라크가 어려운 여건에 놓인 현실을 잘 이용하는 수 밖에 없었다. 다음은 원유 가격을 어떻게 책정하여 적용할 것인가의 문제이었다. 우리는 국제원유가 결정 방식을 고집해 보았으나 석유성은 이라크 국가석유판매기구(Iraqi State Oil Marketing Organization: SOMO)도 국제적인 원유 판매회사이니 이 가격을 적용하자는 의견이었다. 유가는 대개 원유의 유황 함량과 API에 따라 결정되는바 이라크 원유가 시장에 다시 나오게 되면 일반시세보다 다소 낮을 것으로 판단되어 석유성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우리는 프랑스 측의 의견을 수렴해 배분율 9.8%를 제안했다. 계약서 제19조[비용회수 및 생산물 분배]를 2가지로 작성했다. 하나는 배분율 수치를 넣지 않은 공란으로, 다른 하나는 9.8%의 수치를 넣은 것으로 하였다. 수치를 넣은 것은 문제가 생길 것을 염려해 별도로 관리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며칠 뒤 부질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이 수치가 석유성 여러 부서에서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잘못된 것이다. 이라크 측 실무 책임자도 이 부분에 대한 잘못을 시인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최종 단계에서 배분율 수치는 공개하지 않다가 장관에게 제시했어야 되지 않았나 싶다. 그 외에도 문제가 허다했다. 송유관 사용문제, 수출 항구사용문제, 이라크 자제의 우선 사용 등은 업계의 관례에 따라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1억 달러 상당의 물자지원을 위한 차관계약은 석유성이 아닌 무역성과 계약을 체결하기 때문에 확실한 상환 보장을 받기 위해서는 석유성과 연계시켜야 하였다. 무역성 입장에서는 이라크 중앙은행이 보증한다는 것이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1억 달러 차관은 광구계약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석유성의 보증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보증은 이라크 국가석유판매기구가 보증하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만약, 석유성 장관이 한국을 방문했다면? 알 라시드 석유성 장관은 기회가 있을 때 마다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중을 내비쳤다. 그가 말한 한국은 6·25 전란 후 이렇다 할 자원도 없는데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을 이룬 나라라는 것이다. 더욱이 국토도 양분되고 미국, 중국, 일본 등의 강대국의 파워 플레이 속에서 이룩해 낸 한국 경제를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고 한껏 치켜세워 말한 적이 있다. 알 라시드 장관은 할파야 광구 규모정도면 민간차원에서 계약을 추진하기에는 부족하다며, 양국간의 정치적인 교류도 동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을 2번 다녀왔다고 덧붙였다. 더욱이 중국의 고위직은 수시로 이라크를 방문하여 협의를 한다고 하였다. 그 결과로 중국과는 아다프 광구를 계약했다고 알려주었다. 석유성 장관이 중국을 2차 방문 시에 수행했던 외무부 2등 서기관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해 들었다. 이 외무부 직원은 개인적으로 잘 알고 지냈는데 한번은 그가 자기 농장으로 초대하면서 관개시설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여 경제 제재가 끝나면 손써 보겠다고 답해줬다. 그랬더니 바로 옆의 농장이 사담 후세인 것이라며 가끔 한밤에 온다고 귀띔해 주었다. 당시 그 유명한 이라크 부수상 타리크 아지즈(Tariq Aziz)를 한 회의 석상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사실상 수상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다만 이라크 헌법에 각료 회의 의장은 수상이 맡게 되어있어 후세인이 수상을 겸임하게 된 것이다. 그가 말한 요지를 요약 하면 다음과 같다. 유엔 안보리의 對이라크에 대한 각종 제재는 법적 차원에서도 모순이 있으나 이라크는 그 의결사항을 지난 6년간 충실히 이행했다. 하지만, 글로벌 파워인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전략상 이라크 제재를 최대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라크 정부의 요청은 한국 정부의 반미 노선을 원하는 것도, 친이라크 노선을 원하는 것도 아닌 객관적으로 이라크의 이행 여부를 확인하여 유엔의 제재를 해제하는데 필요한 도움을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는 한국 컨소시엄이 수년간 할파야 광구계약 협의를 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서는 한국 정부가 안보리에서 이라크에 대한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등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더욱이 그는 한국이 맡고 있는 안보리 이사국 임기가 6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이 기간 내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지 않는다면 계약체결에 상당히 부정적일 수 밖에 없다고 전했다. 즉, 6개월 후에는 한국 정부로서는 이라크를 위하여 아무 힘도 발휘 할 수 없게 되니 심사숙고하여 양국의 우호관계를 긴밀히 하는 것과 동시에 대형 유전을 확보, 전후 복구 사업에 참여 할 기회를 놓치지 말기 바란다는 의미이었다. 한마디로 ‘Enough is enough’. 이라크는 유엔의 경제 제재는 할 만큼 하였고 안보리의결의 법적 이행을 다 하였다는 요지다. 석유성 장관도 같은 맥락에서 한국이 현재 안보리 이사국이니 이라크 입장을 피력해 달라는 의견을 전하였다. 한국에 돌아와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하여 한국 컨소시엄 회원사는 사장단 회의를 개최하고 당시 관련 부처인 통상산업부에 이라크 석유성 장관의 공식 방한초청을 요청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이라크가 유엔 무역제재 하에 있으므로 정치, 외교적인 면을 감안 할 때 공식 초청 추진은 국가로서 부담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민간차원에서 비공식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을 알려왔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공무원도 문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하는 모습이 역역했다. 감사원 감사에서 일을 하지 않으면 걸릴 일이 없으니 무탈하지만,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감사 문제 건수만 늘어나 문제가 된다는 논리다. 결국에 공식 방한초청은 벽에 부딪쳤다. 여러 안을 고려해 보았지만, 정부 말고는 그 누가 정부를 대신 할 수 있단 말인가! 1년간 이문제로 속절없이 지냈다. 그런데, 초청장을 가지고 바그다드로 떠나려는 하루 전날 한 통의 전화가 통상산업부로부터 걸려왔다. 호사다마일까? 한국 대통령(YS)이 며칠 후 미국 방문(공식초청이 아니었음)을 하는데 이 초청장이 노출되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니 대통령이 귀국 할 때까지 당분간 보류하라는 전갈이었다. 이미 잡아 놓은 일정을 변경하기가 어려워 계획대로 한국을 출발하였다. 그해 7월에 이라크 석유성 장관의 중국 방문이 계획되어 있어 이때 한국을 방문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서두를 수 밖에 없었다. 초청장은 원본과 복사본을 가지고 가서 우선 복사본으로 실무자와 협의를 하고 원본은 나중에 주기로 했다. 어렵게 얻어낸 초청장인데 당장 쓸 수 없게 된 것은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는 한국 외교의 신중함일까? 아니면, 지나친 기우였을까? 어찌됐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부 관리의 의견을 거스를 수 없어 대통령이 귀국 할 때까지 이라크에서 머물러 있으면서 일을 처리하여야 했다. 며칠 후 한국에서 대통령이 귀국했다는 전화를 받고서야 원본 초청장을 정식으로 제출하였다. 석유성 실무자들은 이제 장관이 방한을 할 수 있게 되어 상당히 유리할 것이라고 좋아했다. 한국 컨소시엄은 방한에 대비하여 여러 가지 일정을 준비했다. 산업시찰, 정부관련 부처 방문, 기업체 방문 등 손색없는 일정을 마련해 놓고 기다렸으나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유엔이 추가적인 제재로 이라크 정부 고위층의 해외여행을 금지시킨다는 안보리 의결을 공표하였다. 한국이 안보리 이사국으로 여기에 찬성표를 던졌으니 이라크는 화가 치밀어 올랐을 것이다. 한마디로 ‘동냥을 주지 않더라도 쪽박은 깨지 말지’라는 속담이 머리 속을 스쳤다. P씨 曰, “3천만 달러면 계약 OK!” 할파야 광구는 원래 이태리 ENI와 브라질의 PETROBUA가 처음 손을 댄 광구이다 상당한 양의 물리탐사와 5개 공을 시추하는 등 약 5000만 달러가 투입됐다. 하지만, 이 두 회사는 손을 떼고 한국, 중국, 호주, 일본 등 4개 국가가 경쟁을 하고 있었다. 중국은 정치적으로 밀어붙이고 있었으나 그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래도 중국은 우리보다 좋은 여건에서 뒤늦게 끼어들어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었다. 특히 투자비를 어느 경쟁자보다 낮게 책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생산량은 높았다. 아마도 자국의 값싼 노동력을 투입한다는 것이 전제이었을 것이다. 또한 경험과 기술 수준도 우리 보다는 나았다. 중국은 석유자원을 확보하려고 전 세계를 누비며 광구입찰마다 참여하여 일반 가격보다 20~30% 높게 응찰했다. 할파야 광구도 놓칠 리가 만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의 일인당 국민 소득이 2000달러를 넘게 되면 지구상에서 생산되는 모든 석유를 중국에서 다 소비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미국이 석유부문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노력 중이였지만, 중국은 주 이라크 대사관에서 석유성과 직접 접촉하며,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고 있었다. 다음의 경쟁자는 호주의 BHP(Broken Hill Proprietary)이다. 호주에 기반을 둔 광산회사로 석유 외에도 여러 광물을 생산 판매하는 세계적인 회사이다. 최근에는 회사명도 BHP Billiton으로 바꿨다. 이 회사는 전 세계 수많은 유전을 보유하고 미국 멕시코만 심해 석유 개발에도 참여하고 있다. 호주는 대규모 밀 생산국으로 이를 활용해 이라크 석유광구를 공략한다는 전략도 세웠다. 우리도 호주 밀을 사서 이라크에 주어야 할 판이었다. 이들이 제출한 자료를 입수하여 검토해보니 기술적으로 앞서 있고 경제성도 일목요연하게 표시되어 석유성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호주로서는 밀도 수출하고, 광구도 확보한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 접근했는가? 우리는 기술도, 돈도 부족하지만 석유자원 확보하려는 열정과 꾸준한 노력을 경주하면서 석유성 실무자들과 인간적인 접근을 시작했다. 예를 든다면 협상자 중 한 고위층 부인이 어떤 병에 걸렸는데 혈액 검사가 바그다드에서는 불가하니 좀 도와 달라는 것이다. 쾌히 승낙하고 그 피를 아이스박스에 담아 한국에 가져와 검사하고 치료에 필요한 약도 보내 주었다. 또 한번은 자녀가 의학 공부를 하는데 의서를 구해 달라는 것이다. 그 무거운 의서 7~8권을 가지고 긴 여행을 한 기억도 생생하다. 중동도 동양이다. 결국 인간적으로 친해지니 경쟁자의 정보와 석유성내 주요 방침과 방향을 직간접적으로 알려 주었다. 석유성 실무진과 모든 협의가 끝났지만, 장관 손에 쥐어진 광구 계약서는 도무지 요지부동이었다. 답답한 차에 이리저리 수소문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중국과 호주가 상당히 진척되고 있다는 소식만 들려왔다. 이런 처지니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면 급한 김에 제 손목을 잡는다’는 몽고의 속담이 떠 올랐다.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 이었다. 이 때 뜻 밖에 안기부에서 한국 컨소시엄 4사를 모두 불러 융숭한 점심대접을 하면서 할파야 광구 유전 진척사항을 물어보았다. 그리고 한 로비스트 P씨를 거론하면서 만나 보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진행상황을 상세히 수시 보고하라고 덧붙였다. 혹여 보고가 좀 뜸해지면 전화를 걸어와 물어보곤 하였다. 안기부에서 소개한 P씨를 만나 보았다. 그는 유엔 코피 아난 사무총장도 잘 알고, 이라크 타리크 아지즈 부수상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본 광구 계약과 관련해 그는 간단히 3000만 달러면 체결할 수 있다고 하였다. 방법은 유엔의 경제 제재를 조속히 풀어 주는 대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누가 믿겠는가? 또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헤엄을 칠 수 없다는 생각에 단칼에 거절하니 며칠 후 다시 찾아와 체결방법을 이라크 정부로부터 확답을 받아 올 테니 200만 달러를 선수금으로 우선 달라고 했다. 우리의 답은 간단했다. 그렇게 확실하면 당신 돈으로 우선 처리하고 확답을 받아 오면 돈을 주겠다고 하니 알았고 한 후 연락이 두절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P씨가 어떻게 할파야 광구계약에 개입하게 됐는지 알아 낼 기회가 왔다. 당시 OPEC의 의장국은 인도네시아로 임시회의를 쟈카르타와 발리에서 개최하게 되었는데 여기에 이라크 석유성의 협상 실무책임자인 티그리티 박사가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급거 인도네시아로 이동해 그를 만났다. 그에게 우선 각국의 추진 상황을 물어 보니 상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중국은 아다프 광구, 소련은 웨스트 고로나 광구계약에 각각 서명하였으나 실제 작업은 하지 못하고 자료만 수집, 분석할 정도라는 것이다. 이라크 내에도 별도의 사무실을 개설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소련도 최근 1억 달러 차관을 추진 중인데 결정되면 그 방법을 참고로 알려 주겠다고 하였다. 프랑스(ELF/TOTAL사)가 서명 할 차례인데 아직까지 별진전이 없이 시기를 조율 중이라고 전했다. 이유는 최근 TOTAL이 이란과 가스 개발계약을 체결하면서 미국 뜻에 거슬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영석유 회사인 ELF가 자국정부의 눈치를 보는 중이라고 한다. 중국도 할파야 광구에 관하여 정치적 공세로 압력을 넣고 있으나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이라크 정부는 안보리에서 중국이 이라크에 대해 미온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고 소련만큼 적극적이지도 않아 별도움이 안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장쩌민 주석이 미국을 방문하여 더욱 더 미온적이게 되었다. 그는 일전에 말했던 것을 상기시키며, 현재의 여건상 할파야 광구는 완전 경쟁으로 처리될 것이라는 의견을 내비쳤다. 왜냐면 미국이 워낙 완강하여 중국도, 한국도, 호주도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현재 한국 컨소시엄과 이니셜한 계약서는 장관 손에 있는데 아마도 정치, 외교적인 면을 떠나서 경제적 이용 가치를 고려하는 것 같았다. 석유성 장관이 한국을 방문하지 못하게 된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당시 한국이 안보리 이사국 임기도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광구계약에 있어 힘을 받기는 힘들게 되었다. 부수상인 아지즈는 정치적인 것에만 치중하고 있었으며, 또한 한국은 미국과의 관계상 이라크를 지원하는 발언을 적극적으로 할 수 없는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티그리티 박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이 시점에서 우연치 않게 한국인 P씨가 부수상을 먼저만나고 1997년 10월 초에 석유성 장관을 만나는 자리에 장관이 불러서 참석한 바 있는데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P씨는 “나는 과거 한국 정부의 유엔 Assistant였다”하며 “유엔안보리에 이라크를 위하여 로비를 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할파야 광구를 언급 했는데, P씨가 협상내용를 상세하게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가 그에게 설명을 해 준 것 같았다. P씨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유엔 안보라에 대한 로비 자금은 한국컨소시엄에서 기부형식으로 염출하여 충당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장관은 “왜 원유를 팔아서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였고 기금염출에 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후 장관은 그달 말경 나를 불러 염두해 두지 말라고 하였다. 티그리티 박사도 솔직히 P씨를 믿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다만 P씨가 부수상을 만나서 “이라크를 도우려는 내 친구가 많으니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경제 제재를 해제할 수 있도록 돕겠으니 나를 믿어 달라”는 정도의 이야기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부수상이 구체적인 돈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내가 알기로 2000만 달러를 장관에게 말했다고 한다. P씨가 이렇게 구체적인 금액과 할파야 광구에 관하여 소상하게 알고 있어 이라크 측에서는 한국 컨소시엄이 P씨를 고용한 줄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한국 컨소시엄은 국영석유회사, 삼성, SK 등 굴지의 회사로서 과거 많은 문제를 일으켰던 P씨와 같은 사람을 로비스트로 절대로 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로비스트를 쓸 생각이 없었다. P씨는 우리에게 1000만 달러를 자기 몫으로 얹혀서 3000만 달러를 요구한 것만 보아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지 않는가? 앞으로 유사한 일이 생기면 즉시 알려 줄 것을 요청하고 마무리했다. 그런데 몇 년 후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P씨 친구라며 증인을 서 달라는 전화이었다. 내용인 즉 P씨가 고소를 당해 미국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데 이라크와 어떤 거래도 없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증인을 서 달라는 것이다. 우리와는 어떤 거래도 없었고 다만 귀찮게 했는데 증인을 되어 달라니 가당치도 않아 3번이나 거절했다. 그 후 그가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지도 않다. 계충무 고문은 서울대 경제학을 전공했고 한국전력, 대한석유공사(현 SK), 동아건설 등을 거쳐 한국석유공사 부사장을 역임했다. 한얼상사와 코람자원의 대표이사 활동으로 국제 자원개발 사업에 남다른 성과를 내기도 했으며 현재 HI&T 사장으로 취임해 이라크 할파야 유전개발 사업을 협상중이다. | ||||||||||||||||||
이라크석유는 어디로 흘러가나? (IV)
| 이라크석유는 어디로 흘러가나? (I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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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컨소시엄, 이라크와 PSC 체결하나? 중동 사람들은 땅속의 석유를 단순히 부의 원천으로만 보지 않고 그 이상의 것으로 여기고 있다. 따라서 비록 지하에 있지만 석유에 관한 권한을 외국에게 넘기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이라크는 생산물 분배계약(Product Sharing Contract, PSC)을 체결 해 본적이 없다. 그러나 이라크는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있어 여러 면에서 불리하기 때문에 종전의 청부계약(Service Contract)방식을 외국석유회사에게 고집 할 수 없었다. PSC는 불가피하게 받아들여야만 했다. 한국 컨소시엄도 PSC를 선호하였다. 석유자원 확보라는 관점에서 또 수익 면에서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광구의 경제성 검토 시 적용한 유가가 오르면 그만큼 이익이 늘어나, 마치 타국의 지하에 자국의 원유를 저장 해놓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라크는 사실상 PSC를 한 번도 체결한 바가 없어 협상 초기에는 개념조차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지분의 원유도 이라크 원유판매회사인 SOMO(State Organization for Marketing of Oil)가 그 판매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유인 즉, 이라크 중앙은행 보증보다 SOMO의 보증이 국제적으로 더 신빙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라크 석유성 사람들은 PSC에 관하여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어려운 협의 끝에 결국 인도네시아의 국영석유인 PETANINA의 계약을 벤치마킹해 추진하기로 했다. 당시 한국은 기술, 경험, 자본 등 초대형 유전에 대한 운영 경험이 전무했다. 그래서 이라크 측에서는 한국 컨소시엄의 광구운영능력에 관하여 많은 질문을 던졌다. 광구운영에 관한 기술과 경험은 한국 컨소시엄이 별도로 운영전문회사를 설립 외국기술자를 직접 고용하여 운영 할 것이며, 투자재원은 년간 석유 수입이 150억 달러에 달하며 수십억 불의 석유기금이 있어 별 문제가 없다고 답변하였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상당히 좋았다. 현대건설, 삼성, LG 등 한국기업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이라크는 유엔의 경제제재로 국민의 생활이 궁핍하기 짝이 없었다. 약국은 물론이고 병원에서 조차 약 재고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심지어 비타민A가 없어 아이들의 눈이 머는 등 건강상에도 큰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생필품도 허술했다. 플라스틱 컵은 뜨거운 물을 부면 녹아 내렸다. 현지에서 들은 바로는 국민을 먹여 살리려면 매월 최소한 1억 달러가 소요되는데, 그간 사담 후세인의 개인 돈을 썼지만 이제 그것도 바닥이 났다고 한다. 우리에게 호의적이었던 석유성 차관은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자 몇가지 조언을 해줬다. 그는 이라크는 세계 제2의 석유 보유국이지만, 현재 이라크 국민은 외부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더 격심한 고통을 겪고 있으니 이를 타개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첫째 유엔 경제제재의 해제를 위한 정치적인 지원이었다. 둘째는 상당규모의 물자 지원. 한국의 입장을 고려 할 때 정치적 지원은 어렵겠지만, 물자지원이 적합하니 한국 컨소시엄이 제시하려는 4000만 달러는 솔직히 말해 너무 적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참고로 그는 물자지원 규모가 1억 달러는 되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 컨소시엄도 이라크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며 인도적인 물품지원은 반드시 하겠다고 답변했다. 석유성에서도 정식 문서로 지원을 요청하면서 규모에 관해서는 차관 의견을 말했을 뿐이니 구애 받지 말고 확실하게 다음 회의 때 제의하라고 하였다. 그들이 원하는 물품은 밀, 쌀, 설탕, 아동용 분유, 식용유 등이었으며 지원 방식은 차관형식으로 원유가 생산되고, 유엔 금수조치가 철폐되면 상환하는 조건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차관이 실현되면 광구 계약 체결에 상당히 유리하게 작용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 컨소시엄은 ▲계약기간 23년(이후 5년 연장 가능) ▲연간 훈련비 50만 달러(서명 및 생산 보너스 없음) ▲3년 내 200만 달러의 의무투자지출 ▲매년 원유 생산의 50% 비용회수 ▲한국 컨소시엄에 9.8% 생산물 분배 ▲이라크 정부 지분 25%(기 투자비 5000만 달러 인정) 등의 조건을 제시하며 본격적인 협상에 돌입했다. 할파야 광구는 이라크에서 4번째로 크고 중요한 광구다. 그리고 한국이 참여하기에 당시는 아주 좋은 기회이었다. 이라크 석유성에서는 한국 정부의 고위관리가 이라크를 방문하여 공식적으로 할파야 광구를 요청하면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여러 번 강조하였다.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태에서 이러한 기회를 삼아 조금이나마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그들의 모습을 읽을 수 있었다. 자연스레 미국의 국제적인 정치력, 군사력, 경제력 등 3박자의 힘을 짐작할 수 있었다. 舊소련연방, 베트남, 아프카니스탄 등이 붕괴되었으나 이라크는 미국의 눈엣가시였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미국군대가 힘 안들이고 사우디에 주둔하게 되는 등 중동국가에 미국의 군사기지가 속속 생겨났다. 군사적으로 중동을 견제하기 쉽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라크는 계속해서 미국에 반기를 들고 있었다. 그런 차에 미국 그늘에 있는 한국을 할파야 광구사업에 끌어 들이면 단순한 성과 이외의 성과가 뒤따를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더욱이 당시 한국은 유엔 안보리 이사국이라는 지휘도 확보하고 있어 이라크 정부로서는 구미가 당겼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유엔 경제 제재 연장이 이 시기에 가결되어 협상을 오히려 점점 힘들게 되었다. 탐색전이 끝나고 이라크 석유성과 한국 컨소시엄은 본격적인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각자의 이익을 넘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밀고 당기기를 거쳐, 제1차 협상을 마무리 짓고 그들의 요구사항을 해결하기 위해 귀국길에 올랐다. 우리 정부, 이라크 요구조건에 ‘글쎄’ 한국 컨소시엄은 귀국 후 통상산업부에 제1차 협상 결과를 보고하고 이라크 석유성의 요청사항에 대한 처리문제를 문의했다. 통산부는 관계부처간의 협의가 필요하고 이후에 결정할 것이라고 답했다. 관계부처 회의는 통산부 주관으로 외무부, 안기부, 석유공사를 비롯해 한국 컨소시엄 간사를 맡고 있는 한얼 등이 참석했다. 통산부는 타 부처에 원유 수입실적과 유전 개발 실적을 비교하며 사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당시 유전개발은 16개국 25개 광구에 참여했지만, 성과는 극히 미진한 실정이었다. 또 유가 급등이나 에너지 안보를 고려해 원유 개발 수입을 적극 추진해야 하며, 지난 1년간 이라크에서 유전개발을 위해 상당한 진전을 보였으나 성과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이라크 정부의 요청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통산부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회의에서는 각 부처의 입장만이 제시됐다. 관계 공무원의 이라크 파견에 대해서 외무부는 서방국가의 동향을 파악해보니, 이라크에 관계공무원을 파견한 사실이 없으며, 미국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더욱이 이라크 측에서 관계공무원이 오라고 하는 것은 또 다른 요청-우리 측이 난감해 할 수 있는 요구사항-을 할지도 모르기에 공무원을 파견하기 보다는 암만 주재 이라크 대리대사를 보내는 것이 적절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유전개발에 있어 엄밀히 말하면 제3자적 입장인 안기부도 정치적인 역학관계를 고려해 역시 미국을 염두해야 한다는 점을 확실히 했다. 더욱이 이라크가 유엔의 경제 체제하에 있으므로 우리 공무원의 방문사실이 알려지면 좋을 게 없다는 것이다. 다만 공무원이 가야한다면 비공식적으로 신분을 감추고 가야 하며, 대외적으로는 반드시 비밀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정부 관계자의 이라크 파견 건에 대해 안기부는 프랑스와 독일의 공무원도 방문한 사실이 있음을 확인시켜 줬다. 이라크 물자지원에 대해서 외교부는 유전 확보와 연계시켜 이라크 측의 확답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규모와 절차는 타국의 실례를 찾아 동일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나타냈다. 이외 당시 외교부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사업으로 이라크에 7만 달러 상당의 의료기기 지원계획을 수립하고 이라크 기술 연수생을 훈련시키는 일도 실시하고 있었다. 종합적으로 이라크 석유성에 고위직 공무원의 파견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통산부도 차기 협상 시 외무부에서 제시한 암만의 이라크 대리대사 참석에 동조했다. 물자지원과 관련해서는 우선 의사표시를 하고, 지원의 근거는 서명 보너스와 연계시켜 광구 확보에 관한 LOI나 MOU를 받도록 추진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불확실한 이라크 사정에 ‘빨간불’ 한국 컨소시엄은 이제 양국 정부의 요구사항을 파악했으니 3자간의 최대 공약수를 찾아내어 석유성과 협상을 이끌어 나가야 했다. 그러나 양국정부의 입장을 생각하기에 앞서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염두에 두고 협상에 임해야만 했다. 첫째, 1억 달러 상당의 차관형식의 물자지원은 보기에 좋으나 문제는 언제 제재가 풀릴 것이며, 그렇기에 거치기간을 알 수 없으니 이자율을 얼마로 정해야 하는지의 문제가 있었다. 둘째, 별도의 차관계약을 체결하여 상환을 하게 되는바 할파야 광구에서 원유가 생산되어도 우선 적으로 비용회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여타 차관과 동일하게 취급하게 되면 상환 시기기 늦어 질 수 있었다. 당시 이라크는 소련, 프랑스, 독일 등에 상당한 채무를 지고 있었다. 셋째, 고위직 공무원의 상호 교류는 기대 할 수 없다는 점과 넷째, 미국은 전략적으로 이라크가 이스라엘과 대치하는 것을 좌시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미국은 필요 시 언제나 이라크 침공을 감행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다섯째, 광구계약을 체결해도 경제제재로 사업을 즉시 추진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당시 이라크 석유성도 한국은 초대형 유전의 운영 경험이 없지만, 유전 확보의 절실함으로 소련,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국가 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할파야 광구에서 유전사업을 빌미로 한국 정부를 개입시켜 유엔 경제 제재 하에서 국교정상화까지 염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조광권은 주되 직접적인 연계는 지양하고 생산물 분배율도 1991년 프랑스 elf사에 8% 제시한 바를 들어 한자리 수를 주장했다. 한국 컨소시엄의 협상방안도 정해졌다. 협상 진전에 따라 관계부처의 고위직의 이라크 방문을 실시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사전 물자 지원은 하되 여타 석유회사의 동향 파악하여 대상 품목과 규모를 이라크 측과 점차적으로 천천히 추진한다는 방침이었다. 물자 지원의 근거는 할파야 광구의 개발권 확보에 있으므로 MOU 또는 조건부 PSC 체결을 최종 목표로 하고 있었다. 계충무 고문은 서울대 경제학을 전공했고 한국전력, 대한석유공사(현 SK), 동아건설 등을 거쳐 한국석유공사 부사장을 역임했다. 한얼상사와 코람자원의 대표이사 활동으로 국제 자원개발 사업에 남다른 성과를 내기도 했으며 현재 HI&T 사장으로 취임해 이라크 할파야 유전개발 사업을 협상중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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