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23일 월요일

우리는 이란에 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는가? [Ⅰ]


우리는 이란에 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는가? [Ⅰ]
2011년 03월 02일 (수)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chungmkae@gmail.com
예전에 페르시아로 불렸던 이란은 창조적이며 영광스러운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여러 중동 국가와는 달리 오랜 역사 속에서 훌륭한 독립국가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잘 유지해 왔다. 이 위대한 페르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외면하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간략하게나마 이란의 역사를 한번 훑어 본 다음 석유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먼저 이란의 현 위치를 알아보고 이란의 역사를 회고해 보는 것이 어떨까.
인구는 지난해 추정 7692만 명이고, 종족은 페르시아인 51%, 아제리(아제르바이젠) 24%, 질라키와 마잔다리아니(이란 서북 지역주민) 8%, 쿠르드 7%, 아랍 3% 등으로 구성된다. 이란은 시아파 89%, 수니파 10%인 이슬람국가다. 나머지 1%는 유대교 및 바하이교와 배화교에 속한다. 이 바하이(Bahai Faith)와 배화교(Zoastarian Faith)는 이란에서 창시됐다. 언어는 비교적 다양해 페르시아어와 그 방언 58%, 튀르크어와 그 방언 26%, 쿠르드어 9%, 루리 2%, 발루치, 아랍, 터키어가 각기 1%씩 차지한다. 공식 국명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Islamic Republic of Iran)이다.

  
▲ 이란 위치도
이란은 티그리스강과 샤텔아랍강(이라크 동남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합류한 강으로, 동남으로 흘러 페르시아 만으로 흘러 든다. 길이 200km)을 끼고 이라크의 동쪽, 페르시아 만을 사이에 두고 사우디아라비아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아르메니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젠, 카스피 해 등 구 소련 중앙아시아 지역과 국경을 이룬다. 또 동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과 경계를 이루고 서쪽에는 터키가 있다. 그리고 페르시아 만을 가운데 두고 쿠웨이트, 바레인, 카다르, UAE, 오만과도 마주보고 있으며, 중동 원유 수송의 길목인 호르무즈해협이 지척에 있다.

대부분 지역이 반건조기후이며, 천연자원이 풍부하다. 특히 석유보유량은 세계확인매장량의 10%나 된다. 천연가스는 세계매장량의 16%나 점하고 있어 세계 제2의 가스 보유국이다. 여기에 상당량의 저함량 우라늄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부실한 경제계획, 서구 여러 나라의 금수조치, 높은 출산율, 이라크와 장기간의 유혈전쟁 등은 이란을 가난 속으로 몰아 넣었다. 1인당 국민 소득은 1만1200불, 실업률은 15%, 기아선상 이하가 18%(1385만명)나 된다.

이란은 고대국가부터 1935년까지 서구에서 페르시아로 알려졌었다. 한 왕조가 초 강대제국으로 자리 잡으면, 그 세력이 급속히 팽창해 영토가 수세기에 걸쳐 여러 번의 변화를 반복했다. 아랍, 터키, 몽고, 등의 침략을 받았으나 이란은 그때마다 정체성을 재정립해 독특한 정치체제와 문화를 발전시키곤 했다.
이란과 이란인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들의 오랜 문화를 이해해야 될 것이다. 한 저명한 이란학자는 “이란의 영광은 항상 문화와 같이 한다”고 언급했다. 이란사람들은 타 문화에 대해 개방적이어서 타 문화라도 유용한 것은 융통성 있게 받아 들여 융화시켰다. 이와 같이 타 문화에 대한 수용은 페르시아 정신의 특징인 동시에 이란의 문화를 오랜 기간 동안 지속시킨 원인이기도 하다.

1. 왕조 전 시대(8000~1000 BC) 
기원전 8000년 농업혁명은 농경사회를 이뤄 정착생활을 가능케 했고, 복합적인 문명을 창조했다. 이란고원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명의 요람 중 하나이다. 7000여년 전에 이란의 서북부 지역에서 포도주 병(The Haji Firuz Tepe Wine Jar)이 발견됐는데 이는 고고학적으로 볼 때 지구상에서 아주 오래 전에 포도주가 제조됐다는 증거가 된다. 기원전 1500~800년경에 페르시아족과 메데스족 두 유목민이 중앙아시아로부터 이란고원으로 이주해왔다.
기원전 1000년 예언자 조로아스터는 다음의 개념들을 최초로 내놓은 사람이다. 유일신교, 선악의 이중성, 구세주의 구원, 부활, 최후의 심판,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 등이다. 그는 인간의 구원은 생전이나 사후를 막론하고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위’ 등을 통해서만 확실하게 이뤄진다고 믿었다. 그의 이러한 많은 개념들은 유대교, 기독교와 이슬람교에 깊은 영향을 줬다. 페르시아인들은 그리스와 로마가 다신교임에도 불구하고 조로아스터교(배화교)를 믿었다.
  
▲ 다리우스 금화
  
▲ 페르세폴리스 궁전









2. 아케메네스 왕조(Achaemenian Dynasty, 559~334 BC) 
기원전 550년 키로스대왕(Cyrus the Great)은 세계 최초로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각 지역의 전통, 법률, 언어, 종교 등을 존중해 비교적 호의적인 제국의 기초를 확립했다. 기원전 539년에 바빌로니아는 평화적으로 키로스대왕에게 항복했다.
그는 배려 깊은 정책으로 해방자로서 환영 받았다. 키로스는 억류돼 있던 유대인을 석방해 그들의 조국으로 돌아가도록 도와주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까지 도와줬다. 구약성경 이사야서에 그는 하나님의 목자로 묘사돼 있다. 이사야서 44장 28절 및 45장 1~2절, 하나님은 키로스(한국성경에는 고레스로 표기됨)를 왕으로 택하셨느니라.
다리우스(Darius)대왕(522~486 BC)의 치세 때 페르시아제국은 절정기를 맞았다. 키로스가 세워놓은 전통을 이어 받아 다리우스는 자신의 통치하에 있는 모든 사람의 인권을 소중하게 여겼다. 그는 정의를 굳게 믿었고, 불공평을 싫어했다. 특히 힘없는 사람이 권력에 부당하게 짓눌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의 목표는 위대한 입법자와 탁월한 조직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제국통치를 위해 지방장관제도(the satrapy system, 고대 페르시아의 태수제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제도와 흡사함)를 기본 구조로 삼았다. 그는 또 많은 도로, 항만, 은행건물(영어로 수표인 ‘check’는 고대페르시아어에서 유래됨), 정교한 지하 관개수로와 나일강과 홍해를 잇는 운하를(초기 수에즈운하의 효시) 건설했다.
다리우스는 역사상 처음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주화를 대량 주조, 유통시킴으로써 인류의 경제활동에 혁명을 가져왔다. 이러한 혁명은 도량형의 표준화와 상법의 집대성과 함께 국제무역을 촉진시켰으며, 페르시아 경제를 새로운 번영의 단계로 올려 놓았다.
다리우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부와 찬란한 문화상을 드높이기 위해 페르세폴리스 궁전을 건설했다. 이 건설을 위해 제국의 방방곳곳에서 장인과 재료가 몰려들었다. 또 길이가 1500마일(2400km)이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긴 도로를 건설했다. 이를 방대한 릴레이 망으로 연결해 통상 3개월이나 걸리던 이동 기간을 6~9일로 단축시켰다.
페르시아 우편서비스의 모토는 기억할만한 것으로 ‘눈이오나, 비가오나, 열기와 밤의 어둠 때문에 멈추지 않는다’ 이다. 미국 서부개척시대 그 유명한 ‘Pony Express Mail(조랑말 속달우편)’도 이를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페르시아 귀족들은 운동경기와 전투훈련을 목적으로 폴로와 흡사한 경기를 했으며, 이후에 점차 오늘날의 폴로 경기로 발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는 페르시아와 전쟁(490~479 BC)중에 단 한번도 페르시아의 중심부를 위협하지 못했다. 페르시아는 전쟁으로 얻지 못하면 외교적 수단을 써서라도 쟁취했다. 페르시아-그리스 전쟁이 끝난 후 페르시아 왕은 아테네와 스파르타 상호간을 성공적으로 견제시켜 150년간이나 평화를 누렸다. 페르시아의 재정 및 해군의 지원은 펠로폰네소스 대전에서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이기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전쟁 후 페르시아는 반대로 아테네를 도와주면서 두 도시국가에 대해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페르시아제국은 2세기 동안(550~334 BC)이나 세계 초강대국으로 군림했다. 그 결과 동서양의 중요한 교류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다. 세계최초로 종교에 대해 관대했고, 다양한 언어와 종족, 종교, 문화 등의 복합적인 요소들로 구성돼 있었다. 로마제국 이전에 이미 법치주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군대,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국가행정 등에 관해 많은 선례를 남겼다. 그러나 페르시아제국의 더 위대한 유산은 어떻게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의 중앙정부 밑에서 융성한 문화를 창조했고, 경제적으로 번성할 수 있었는가를 최초로 보여준 데 있다.

3. 알렉산더에서 파르티아 왕조까지(334 BC~224 AD) 
  
▲ Alexander and Roxana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침략했다. 아케메네스왕조는 225년만에 다리우스3세왕을 끝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페르시아 군대를 무찔러 승리를 거둔 후 알렉산더는 수많은 페르시아인의 처형을 명령했고, 그의 군대에게 약탈과 강간을 허용해 승전의 광기를 부리게 놓아두기까지 했다. 그리고 페르세폴리스 궁전까지도 불태워버렸다.
그렇지만 그는 스스로를 아케메네스 왕의 계승자로 생각해 사이러스대왕 무덤 앞에 헌사를 올리기도 했다. 페르시아의 법정 관습을 모방하는 한편 그리스문화와 페르시아문화를 융합해 새로운 문화창조도 시도했다. 그는 페르시아여인 록사나와 결혼했다. 또한 모든 장군과 1만여명의 병사들에게 합동결혼식으로 자기를 따르라고 명했다.
알렉산더대왕은 기원전 323년에 죽었다. 그는 뛰어난 장군이었지만 행정관리 능력은 아주 미흡했다. 사후 얼마 안돼 제국은 장군들 간 다툼으로 분열됐다. 알렉산더의 페르시아정복이 남긴 중요한 유산은 페르시아 제국의 관행을 서양에 전래시킨 것이다. 많은 관행 가운데 중요한 것은 국가행정과 법치주의에 관한 것이며, 후세에 로마제국이 많은 것을 채택했다. 알렉산더의 한 장군출신이 셀레우코스 왕조(323~141 BC)를 수립해 근동과 아시아 일부 지역을 통치했다.
이란 북동쪽의 부족국가였던 파르티아는 셀레우코스를 서서히 패배시키고, 페르시아 전역에 걸친 통치권을 장악해 파르티아 왕조를 세웠다(247 BC~224 AD). 이 왕국의 창시자는 아르세이시스(Arsaces)이며, 모든 로마 황제를 카이사르라고 부르듯이 30여명의 파르티아 왕들도 아르세이시스라고 불렸다. 기원전 53년 로마와 싸워 승리함으로써 당대 초강대국으로 격상됐다.
로마인들은 연속적으로 엄청난 로마군 사상자를 안겨준 파르티아의 기마 궁수(Parthian shot : 후퇴 시에도 뒤돌아 보고 활을 쐈다는 고사에서 유래, 현재 그 뜻은 ‘자리를 뜨면서 내뱉는 악담’)에 대해 크나큰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파르티아왕국은 500년 동안이나 오랜 통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문명의 흔적은 작은 예술품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4. 사사니아(Sasanian) 왕조(224~632 AD) 
아르데시르(Ardeshir)1세는 아케메네스시대에 번성했던 도시 에스타흐에 사사니아 왕국(224)을 세웠다. 사사니아 왕조는 페르시아의 문화와 조로아스터교를 부활시켰고, 아케메네스 규범을 따르려고 의도적인 노력을 꾀했다. 사사니안은 자신들의 최대의 적국인 로마, 비잔틴과 중국간 무역을 후원했다. 수세기 동안 사용됐던 금은 중국에서도 주화가 발굴된 바 있다.
사프르 1세가 로마제국을 침공해 그 황제를 투옥시켰다. 그리고 고등교육을 담당하는 사프르센터를 건립했다(260). 마니교의 창시자인 마니는 조로아스터교, 기독교와 불교의 기본원리를 한대 역어 전 세계적인 새로운 종교를 도입하려고 했다(274). 마즈닥(Mazdak)은 종교 활동가이며 사회개혁론자로서 사유재산제도 폐지, 부의 분배, 비폭력주의, 채식주의 등을 지지했다.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 농민과 귀족간에 중대한 계급투쟁으로까지 번지게 됐다. 아마도 그가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사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다(528).
호스로(Khosrau)의 통치시절에 사사니아왕조가 그 절정기를 이룩했다. 그는 장학금제를 촉진시키고, 그리스와 인도의 의학서적을 페르시아어인 모국어로 번역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호스로 1세 ‘사프르 도서관’은 세계에서 최다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또 비잔틴 제국의 탄압에 못 이겨 피해온 철학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재정적인 지원을 해줬다. 호스로1세는 포퓰리스트인 왕인바 아마도 마즈닥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저명한 수상이 주사위놀이의 일종인 백개먼(Backgammon)을 고안해 냈다(531~579).
570년에 예언자 마호메트가 메카에서 탄생했다. 그를 믿는 자들에 대한 박해가 우려돼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했다. 그의 이주(Hijra) 시점이 이슬람교 탄생과 이슬람 달력의 시작이 됐다. 하나님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환영과 계시로 마호메트에게 이슬람 신앙을 전달했다고 한다. 모슬렘들은 마호메트를 모세, 예수, 다음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예언자라고 믿고 있다(622).
두 번 연속해서 여군주인 프란도르트와 동생 아자르미도가 사사니아를 통치했고, 프란도르트가 비잔틴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629~632). 예언자 마호메트 사후 그의 계시를 모아 편집한 이슬람 책이 코란이다.
5. 아랍 칼리프체제(통합된 회교정체성을 가진 정부) 
  
▲ 옴미야드의 영토

페르시아 왕국은 수세기 동안 로마와 비잔틴에 맞서 잘 버텨 왔지만 새로운 신념 즉 이슬람신앙으로 무장한 아랍 유목민에 의해 겉잡을 수 없이 붕괴됐다. 평등과 통합을 내세우는 이슬람교의 이상은 융통성 없는 계급사회 속에서 살던 페르시아인에게 많은 호감을 갖게 하는데 충분했다. 주 이슬람교의 다섯가지 지주는 다음과 같다(642).

ⓛ 알라신 외에 다른 신은 없다. 마호메트는 알라의 사도다.
② 기도로 항상 알라와 접촉하라.
③ 메카에 성지순례를 통해 이슬람공동체의 일체감을 체험하고, 아이디어를 서로 교환하라.
④ 금식을 실천해 불행자의 고통을 느껴보고, 수양을 쌓아라.
⑤ 구호와 자선을 베풀어 받은 축복을 타인과 나누어라.
이맘 알리(Imam Ali), 마호메트의 사위이자 네 번째 마지막 칼리프가 암살됨에 따라 시아파와 수니파 양 종파로 분열됐다. 분열의 주요인은 누가 최고지도자가 되느냐의 문제였다. 시아파는 마호메트의 정통성이 그 딸 파티마와 남편에게 계승돼 이슬람세계가 선도돼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럼에도 페르시아는 거의 9세기 동안이나 시아파 국가가 아니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양 파간의 충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661).
옴미아드 칼리프체제가 이슬람세계를 통치함으로써 최초의 무슬림 왕국을 세웠다. 비록 그들이 사사니아 행정관행을 따랐지만 이슬람교를 주 종교로 삼았으며, 특히 페르시아문화를 경계했다. 그들은 또 페르시아어 대신 아랍어 사용을 강요하고, 새로운 아랍·페르시아 문자 사용을 종용하며 고유한 페르시아 문자의 말살을 유도했다. 또 이집트과 앗시리아를 아랍화하는데 사용했던 방법으로 페르시아를 더불어 아랍화하려고 했으나 페르시아의 끈질긴 독립정신과 정체성을 근절시키지는 못했다(661~750). 696년에 아랍어가 이슬람세계의 공식언어가 됐다.
아바사디(Abbsadis)는 페르시아 사람들의 재정지원과 도움을 받아 옴미아드 통치를 종식시켰다. 그들을 승리로 이끈 아바사디 군대는 페르시아 출신 호라사니 장군이 지휘했다. 이슬람의 수도는 다마스쿠스에서 예전 사사니아 수도 근처에 신설된 도시 바그다드로 옮겨졌다. 이 환도는 페르시아 세력이 이슬람세계에서 점차 커지고 있다는 상징이 됐다(750).
아바사디 칼리프 체제는 많은 국가 기능을 페르시아의 각료와 관료주의에 의존했다. 이 아바사디 치하에서 페르시아의 관습은 깊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고관이나 각료들의 사무실은 사사니아 방식을 그대로 모방했다. 그 후 칼리프는 법정의식도 사사니아 형식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아바사디 의 정치구조는 페르시아인 바마키드에 의해 설계됐고, 바마키드가 출신 여러 명이 고급관리에 등용됐다. 아바사디 통치는 이슬람세계에서 최대 세력을 이뤘고 크나큰 영광을 누렸다(750~1258).
  
글: 계충무 국제아동돕기연합 고문
계충무 고문은 서울대 경제학을 전공했고 한국전력, 대한석유공사(현 SK), 동아건설 등을 거쳐 한국석유공사 부사장을 역임했다. 한얼상사와 코람자원의 대표이사 활동으로 국제 자원개발 사업에 남다른 성과를 내기도 했으며 현재 HI&T 사장으로 취임해 이라크 할파야 유전개발 사업을 협상중이다.
* 상기 기사는 에너지코리아뉴스의 자매지 월간 <CEO ENERGY> 2011년 3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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